송시열의 회니시비(懷尼是非) 인식과 대응

Song Si-yeol's Perception and Response to the Argument with Yoon Jeung from 1684 to 1688

초록

1684년(숙종 10) 4월 윤증이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ㆍ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 표현한 「신유의서(辛酉擬書)」가 공개되면서 회니시비(懷尼是非)가 본격화되었다. 논란 과정에서 윤증은 송시열에게 기질 공부의 부족함을 넘어 본성 자체에 문제가 있으며, 그가 내세운 주자학과 존주대의(尊周大義)는 패도와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치욕스러운 논쟁의 전말이 조야에 공개되자 송시열은 대단히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뒤이어 1685년(숙종 11) 2월 무렵 「사국서(史局書)」와 홍수주 상소를 계기로 회니시비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윤증이 이이의 입산(入山) 및 권순장ㆍ김익겸의 순절을 거론하면서, 그간 윤선거의 강화도 행적을 둘러싸고 전개되던 회니시비의 논점이 도학과 절의에 관한 시비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숙종은 윤증 등을 ‘사문의 죄인(斯文之罪人)이자 세도의 큰 변고(世道之大變)’라 규정했다, 송시열 역시 윤증을 비롯한 소론을 윤휴와 같은 부류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87년(숙종 13) 3월 「정묘축조서(丁卯逐條書)」를 통해 윤선거를 비난하며 임진왜란 때 강화론을 주장했던 외조부 성혼과 기축옥사 때 북인과 결탁했던 그 아들 성문준의 처신까지 지적했고, 이는 소론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노론과 소론 모두 자신들의 학문적 근원인 이이와 성혼이 상대방으로부터 비난받는다고 생각하는 이상, 두 학파의 분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송시열은 회니시비를 전후한 일련의 사건들이 공자ㆍ주자ㆍ이이가 전수해 온 도학과 절의에 대한 남인ㆍ소론의 공격이라 간주했다. 그리고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패퇴하게 된 상황을 주자가 위학(僞學)으로 배척되었던 송대 경원당금(慶元黨禁)에 비견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송시열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존주위주(尊周衛朱)의 가치 수호를 위한 순교의 의미를 부여했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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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시열의 회니시비(懷尼是非) 인식과 대응
제목 (타언어)
Song Si-yeol's Perception and Response to the Argument with Yoon Jeung from 1684 to 1688
저자
우경섭
발행일
2025-05
유형
Y
저널명
한국학연구
77
페이지
417 ~ 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