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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활동을 계속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서양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운 영학당(英學黨)은 1898년 음력 11월 흥덕민란을 일으켰고, 1899년 음력 4월에는 정읍·고창지역에서 봉기하여 정부군과 무력 충돌했다. 영학당을 조직한 중심세력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전라우도를 지휘한 손화중의 부하들로서 농민전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영학당운동을 꾀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그들은 왜 서양종교를 연상시키는 영학을 칭했으며 서양종교는 어떤 종파를 가리키는가? 이 글은 영학당이 기독교의 남장로교 교단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실증하고자 한 것이다. 영학의 하급간부는 계(稧)조직의 형태로 조직을 확장했다. 주민들로 하여금 영학의 계안에 5전(錢)씩을 납부하고 가입하도록 유도하고 주일예배와 같은 집회를 열어 조직을 강화했다. 마치 기독교의 예배와 헌금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미국인 목사’가 고부에서 설교할 때 영학 중에 작폐하는 자가 있으면 전주 완산칠봉으로 잡아 보내라고 지시한 사실을 보면 영학당과 기독교 선교사가 인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전주 완산칠봉’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기지를 구축한 곳이기 때문이다. 영학당에서는 기독교를 표방하여 위장했다면 기독교 선교사는 그 실체를 모르고 영학의 조직담당자를 성경을 팔면서 전도하는 매서인(賣書人)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영학이 기독교를 표방하게 되면서 그에 적절한 의례와 교리도 제시되었다. 기독교의 신관, 윤리관에 입각한 교리를 만들고 그에 합당한 의례를 행했다. 체포된 영학당의 하급 간부는 영학을 예수교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이처럼 영학은 조직적, 인적, 교리적 측면에서 기독교를 활용했다. 본질적으로 동학당인 영학당은 합법적인 선교가 가능한 기독교를 표방함으로써 조직을 확대하고, 이 조직을 동원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계승한 봉기를 꾀했다. 그렇지만 동학이 영학을 표방하여 기독교와의 경계선이 무뎌지면서 자기정체성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경계를 넘고 있었던 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키워드
- 제목
- 영학의 조직과 기독교와의 관계
- 제목 (타언어)
- The Relationship between Organization of Younghak and Christianity
- 저자
- 이영호
- 발행일
- 2018-03
- 유형
- Y
- 저널명
- 한국기독교와 역사
- 호
- 48
- 페이지
- 155 ~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