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보기
초록
신홍균은 1881년 8월 20일(음)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동상리에서 신태검(申泰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의업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과거시험 잡과에 합격한 한의사 집안으로 대대로 한의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1911년 북간도 망명을 시작으로 장백현 17도구 왕가동에 자리잡고, 1915년 봉오동에서 최운산 장군을 만나 훈련하는 봉와직염으로 고생하던 병사들을 치료해주고, 훈련과정에도 참여하여 다가오는 항일전에 대비했다. 하지만 최운산 장군과 점차 이견차이가 있어 봉오동을 1년 만에 떠나고, 소래 김중건과 인연이 닿아 함께 원종교를 창립하고 항일무장단체 대진단을 설립하는데 동참한다. 신홍균은 경신참변으로 파괴된 한인 마을에서 많은 학교를 설립하였고, 원종교와 대진단의 이름으로 설립한 학교는 14개정도 된다고 한다. 일제가 1931년 괴뢰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국 국방군인 만주군이 편성되자, 만주지역에 이주해온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합심하여 일본제국을 향한 한중항일연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1933년 대진단 일원 중 50명은 한국 독립군에 합류하게 되고, 그 중 신홍균은 본격적으로 군의관으로서 활동하게 된다. 대전자령 계곡에서 매복중에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장마에 몸까지 젖어 여러 가지로 상황이 순탄치 못하였다. 이때 신홍균은 한의학 본초지식을 발휘해 산에서 자생하는 검은 목이버섯을 따와 빗물에 씻어 독립군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었고,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대전자령 전투 이후 일본군의 독립군 탄압이 가중되는 바람에 독립군 장정 대부분이 중국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뿔뿔이 흩어지고 한국독립군 조직이 유명무실해지고, 현지에 남은 독립군들은 일부가 중국에 귀화하였으며, 신흘, 최악, 최만취, 안태진 등은 잔류부대를 이끌고 영안, 액목, 목릉, 밀산일대의 산림지대에서 지속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키워드
- 제목
- 독립운동가 신홍균 한의사에 대하여
- 제목 (타언어)
-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Hong-Kyun Shin
- 저자
- 이상화
- 발행일
- 2022-11
- 유형
- Y
- 저널명
- 한국의사학회지
- 권
- 35
- 호
- 2
- 페이지
- 69 ~ 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