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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1637년 조선의 遼民 대책과 토벌론
초록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이후 청천강 이북에서 벌어진 東江鎭과 遼民의 작폐는 호란이전보다 한층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毛文龍은 가도 인근 해안을 넘어 내륙까지 진출하여군사를 주둔시켰고, 요민들은 피난한 조선인들의 땅을 차지하고 눌러앉으려 하였다. 또한 그들은 조선의 관리와 군인들을 공격하고 사신 일행까지 습격하는 등 조선의 공권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모문룡은 조선인들까지 동강진에 편입함으로써, 청천강 이북 일대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고자 하였다. 1629년 모문룡이 요동경략 袁崇煥에 의해 처형된 뒤, 명 조정은 가도의 일부 병력 및요민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동강진의 내분이 지속되면서 그동안 요민들에게 의식을 공급하고작폐를 단속하던 최소한의 기능조차 마비되자, 절박한 처지에 내몰린 요민들은 동강진의 통제에서 벗어나 내륙을 횡행하며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요민의 登州 송환을 기본 방침으로 고수하던 조선 조정에서는 두가지 방책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동강진과 요민을 무력으로 제어하려는 토벌론과 청천강 이북의 통치를 잠시 유보하자는 청북포기론이었다. 특히 1630년 劉興治의 반란 이후 요민을대하는 조선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조선 조정은 요민들이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내통할가능성을 명분으로 삼아, 가도에 대한 식량 지원을 중단하고 군사를 보내 가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명 조정은 여전히 동강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했고, 요민의 작폐는 계속되었다. 또한 후금은 동강진의 내분을 틈타 가도를 공격하며 재침을 위협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 조선은 청북의 방어체제를 완비하지 못한 채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1637년 청에 항복한 직후 수군을 파견해 가도 공격에 동참하여 요민을 토벌하고, 남한산성에서 맺은 약조에따라 요민을 수색하여 청으로 송환하기 시작했다. 이제 명나라 백성으로 조선이 보살펴야 할요민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체포하여 북송해야 할 청의 백성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키워드
- 제목
- 1627~1637년 조선의 遼民 대책과 토벌론
- 제목 (타언어)
- The Countermeasures against Liaodong Refugees and the Doctrine of Suppression in Choseon Dynasty from 1620 to 1627
- 저자
- 우경섭
- 발행일
- 2022-08
- 유형
- Y
- 저널명
- 한국학연구
- 호
- 66
- 페이지
- 9 ~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