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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교체기 조선에 표류한 漢人들-1667년 林寅觀 사건을 중심으로-
Chinese Adrift in Choseon Dynastyin 17th century-Focusing on the Case of Lin Yin-guan(林寅觀) in 1667-
초록
16세기 후반 동아시아 해상 무역이 발달하면서, 조선에서도 표류 사건의 빈도가 급증했다. 또한 청조의 입관과 남명 수립 이후, 조선은 중원에서 표류해 온 한인들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1644년부터 1680년대 초반까지 표류 한인 대부분은 남명의 세력이 미치던 중국 남부 출신으로, 특히 대만을 중심으로 반청항쟁을 이어가던 정성공․정경 부자 휘하의 무역상이었다. 병자호란 패전 이후 청의 강압 아래 놓여있던 조선 조정은 1647년 명 유민을 자처하는 한인들을 처음 청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1667년 제주에 표착한 임인관 일행 역시 자신들이 정경 휘하의 항청세력이며, 중화의 상징인 남명 영력제의 책력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청관계의 악화를 우려한 조선 조정은 나가사키로 보내줄 것을 간청하던 그들을 북경으로 압송했다. 그 결과 조정이 앞장서서 존주대의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일어났고, 정조대에 이르러 임인관 일행은 임경업 등 항청인사들이 모셔진 의주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임인관 사건 이후 조정은 현실과 여론 사이의 곤혹을 모면하기 위해 지방 수령의 책임 아래 표류 한인들을 몰래 돌려보낼 방도를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1681년 삼번의 난이 진압되어 청의 중원 지배가 확고해지고, 1683년 대만의 정씨 세력마저 항복해 해금이 철폐된 뒤 그같은 고심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이제는 청의 백성임을 주장하는 표류 한인들을 어디로 송환해야 할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키워드
Lin Yin-guan(林寅觀); drifting Chinese(漂漢); Koxinga(鄭成功); Record of Trust in 1667(丁未傳信錄); 임인관(林寅觀); 정미전신록(丁未傳信錄); 표한(漂漢); 정성공(鄭成功); 황조유민(皇朝遺民)
- 제목
- 명청교체기 조선에 표류한 漢人들-1667년 林寅觀 사건을 중심으로-
- 제목 (타언어)
- Chinese Adrift in Choseon Dynastyin 17th century-Focusing on the Case of Lin Yin-guan(林寅觀) in 1667-
- 저자
- 우경섭
- 발행일
- 2019-03
- 유형
- Y
- 저널명
- 조선시대사학보
- 호
- 88
- 페이지
- 47 ~ 76